검은 어둠이 짙게 내리깔리는 무거운 밤공기.
한 남자가 로브를 깊게 눌러 쓰고 걸어가고 있었다. 여느 몰록의 로브를 입고 있었지만 걸음걸이는 몰록의 절도 있는 걸음걸이가 아닌 급한 종종걸음이었다.
그는 뒤를 두리번거린다. 좌우를 살핀다. 전방을 조심스럽게 살핀다. 모든 방향을 급하게 살핀다.
그가 이동하는 곳은 거대한 저택이었다. 저택이라고 해도 샬록이나 인간의 저택처럼 화려하지 않았다. 그저 소박한 회색빛 네모난 건물이었다. 그 앞에는 두 명의 몰록 경비병이 하품을 하며 서 있었다.
사내는 조심스럽게 경비병이 없는 곳으로 둘러갔다. 익숙한 듯 저택의 담벼락에 나 있는 틈을 발견했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간 후에는 종종한 걸음으로 저택 뒤편의 조그마한 문을 향해 걸었다. 다행히도 이곳은 경비가 그렇게 단단한 곳은 되지 못했다.
사내는 그 문 앞에서 로브를 벗었다. 그는 샤일이었다. 그는 문 앞에서 눈을 가져다 댔다. 인간들이 사용한 동공인식시스템이었다.
-신원확인, 샤일.-
나무로 된 작은 문이 어울리지 않는 전자음과 함께 열렸다. 그는 안으로 들어섰다.
어두운 방안에는 촛불 하나만 켜져 있었다. 그 앞에는 중년의 몰록이 원탁에 앉아 있었다. 굳건한 입술과 갸름한 얼굴은 미남형으로 보였다.
“아버지.”
그는 샤일의 아버지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샤일과는 달리 미소 따위는 얼굴에 없었다.
“왔느냐.”
샤일은 옅은 미소와 함께 목례 한 후 자리에 앉았다.
“그래 그곳에서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느냐?”
“지금 이대로 샬록을 친다면 샬록은 무너질 것입니다,”
샤일의 말에 그의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앉아라.”
자리에 앉은 샤일은 질문했다.
“누굽니까.”
“누구 말이냐.”
“왕 말입니다.”
“불경스럽구나.”
아버지는 차를 마셨다. 그의 얼굴에는 약간의 노기가 담겨 있는 듯 했다.
“혼혈입니다.”
“그런대?”
“몰록은 혈통을 중시하지 않습니까? 샬록과 몰록의 혼혈이라니요.”
“뿐만이 아니다. 인간의 혼혈이기도 하다.”
인간의 혼혈이라는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그럴 수가 있는 겁니까?”
“너의 경우도 있지 않느냐.”
샤일은 침묵했다. 헤어진 자신의 아이들이 생각나는 듯 했다. 그러고 보니 왕도 어디선가 본 듯 했다.
“떠나라.”
“그럴 수 없습니다.”
“넌 샬록을 증오 하는 만큼 우리 몰록도 증오하지 않느냐?”
“국사를 맡고 싶습니다.”
그의 아버지의 눈이 크게 뜨였다. 국사라니... 수천수만의 샬록의 피를 묻힌 그가 왕의 스승인 국사를?
“비난을 받을 것이다. 비난의 정도를 넘어설 것이다.”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허락할 수 없다. 샤이칸이 허락할 리가 없다.”
“당신은 귀족 중에서도 최고 귀족이 아닙니까? 당신의 힘이라면 다른 귀족들에게도 입김이 들어가지 않겠습니까? 샤이칸도 귀족들의 뜻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그의 아버지는 눈을 감았다. 한참동안을 생각하는 듯 했다. 촛불이 움직인다. 허나 샤일은 움직이지 않는다. 팔짱을 낀 채 그저 자신의 아버지만 바라보고 있었다.
“한번 움직여는 보겠다. 하지만 기대는 말아라.”
샤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 물러갑니다.”샤일은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그의 아버지는 한참을 나간 문을 바라보았다.
“징그러운 놈.”
혀를 끌끌 찼다. 뒤이어 뒤쪽에서 검은 옷을 입은 몰록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은 복면으로 가리고 있어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명령을 내리겠다. 샤일이 국사가 되면 기회를 봐서 샤일과 함께 왕도 죽여라.”
복면인 고개를 끄덕였다.
“수만의 몰록의 피를 묻힌 놈이... 뭐 국사?”
그의 아비는 콧방귀를 뀌었다.
샤일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이미 날이 밝았는데도 계속 누워있다. 밤새 잠도 자지 않고 저 모양이었다. 무슨 생각이 그리 많은지 로만에게도 말을 아꼈다. 답답한 로만은 계속해서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 잘 정돈은 되어 있지만 경직돼 보이는 몰록의 건물들이 더욱더 그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똑똑하며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샤일은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로만은 문 앞으로 다가가 물었다.
“누구시오.”
“저희는 왕명을 받들어 왔습니다.”
로만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무슨 말이야.
“이게 무슨 일이지?”
샤일은 비슬비슬 일어나 문 앞으로 다가갔다.
“무슨 말인가, 샤일!”
그는 로만을 무시한 채 문을 열었다. 회색 망토를 두른 두 사람이 그의 앞으로 나아왔다. 그들의 손에는 왕의 칙서가 들려 있었다. 둥근 황금 통에 든 칙서를 샤일이 받아 들었다.
“칙서의 내용은?”
샤일의 물음에 그들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폐하의 국사로 임명하는 내용입니다.”
두 사람의 말에 로만의 눈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이게 무슨 말인가! 샬록에게 몰록의 국사를 맡기다니!!!”
“나의 반쪽은 몰록이기도 하지 않은가.”
샤일은 칙서가 든 황금 통을 뒤로 던졌다. 그 불경한 모습에 두 사람은 눈살을 찌푸렸다.
“받아들인다고 가서 전해.”
로만은 더욱더 흥분하여 얼굴이 붉어졌다.
“무슨 소린가!”
그를 무시한 채 샤일은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러자 두 사람은 목례하고 사라졌다.
“무슨 소린가, 샤일! 몰록의 국사라니!!”
로만의 물음에 샤일은 묵묵부답이었다. 로만의 몸에서 오오라가 이글이글 뿜어져 나왔다.
“무슨 짓인가, 로만.”
“자네가 몰록의 국사가 된다면 내가 자네를 죽이겠네.”
손 주위로 몽골몽골 물방울이 맺히며 손을 모두 감싸고 있었다.
“자네 진심인가?”
“진심이야!!”
로만은 푸른 물덩이를 빠르게 집어 던졌다. 빠르게 나아가던 물덩이는 확 퍼지며 자잘한 물방울이 되어 쏜살같이 날아갔다. 허나 샤일은 손쉽게 피했다. 날아가던 물방울은 벽에 파바박 소리를 내며 박혔다.
“자네는 나를 이기지 못해.”
“어련 하시겠나! 피의 날개 한이니까!”
로만은 빠르게 그를 향해 들려 들었다. 그의 손에는 물방울이 맺혀 푸른 검의 형상으로 맺혀갔다.
“어리석은 사람!”
샤일이 손을 뻗었다. 순간 로만의 움직임이 멈췄다. 동시에 그의 몸은 바닥에 납작 엎드려졌다. 바닥이 쿠직쿠직 하는 소리와 함께 둥글게 꺼졌다.
“크윽... 중력장...”“흥분하지 말고 잘 듣게. 난 이곳에서 몰록의 정보를 입수하기 위해 왔네. 그러기 위해서 아버지의 위치를 이용했지.”
“자네를... 큭... 어떻게 믿지?”
“자네의 친구니까.”
샤일이 눈을 부릅뜨자 바닥으로 완전히 눌려 있던 로만의 몸이 조금씩 움찔거렸다. 서서히 일어나는 로만. 그는 뼈마디가 시린 듯 매만졌다.
“역시 강골이군. 보통의 샬록이었다면 뼈가 모두 부서졌을 게야.”
“이렇게 나를 공격한 자네를 어떻게 믿어야 하나?”
“공격은 자네가 먼저 했네.”
로만은 피식 웃었다. 샤일 역시 피식 웃었다.
“모든 것이 이야기가 된 것인가?”
샤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꼬장꼬장한 귀족연합이 인정해 주던가?”
다시 한 번 샤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난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겠군. 지금이라도 돌아가겠네.”
“그래.”
“언제 다시 볼 수 있겠는가?”
“때가 되면.”
샤일은 가방을 쌌다. 짐이라고 해도 별 것이 없었다. 단출한 가방을 훌쩍 둘러맨 그는 로만을 바라보았다.
“내가 먼저 가봐야겠어. 아버지의 저택으로 돌아가야지.”
로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밖으로 나오는 샤일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사라졌다.
“다시 만나면 자네와 난 적이 되어 있겠지. 잘 가게 나의 친구여.”
샤일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왕의 거처였다. 거대한 거성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동안 많은 몰록의 눈초리가 뜨겁게 다가왔다.
“무리도 아니지.”
머리를 긁적이는 그에게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샤일 공이신가요?”
몰록답지 않게 푸른 망토를 착용한 그는 꽤나 젊어 보이는 자였다. 얼굴의 3분의 1정도를 가린 금빛 가면을 쓰고 있는 분홍빛 머리의 그는 꽤나 화려해 보였다.
“자네는?”
“저는 유린입니다.”
“몰록의 사내치고는 화려하군.”
“젊은 세대니까요.”
웃고 있는 얼굴과는 달리 그의 눈빛에는 살기가 감돌았다. 그것을 느낀 샤일은 주먹을 꼭 쥐었다.
“누가 보냈나?”
“이런, 이런... 국사어르신께 제가 무뢰를 범했군요. 당신의 과거의 화려한 이력이 저의 무인의 기운을 불러 오고 있습니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누가 보냈나 물었다.”
“저는 샤이칸님께서 보내셨습니다.”
샤이칸이라는 말에 샤일은 웃음을 보였다.
“화친의 증거인가?”
“그런 셈이죠. 당신의 호위를 위해 보내셨습니다.”
“호위? 이 나를?”
유린은 다시금 살기를 담은 웃음을 보이며 주변을 보며 말했다.
“당신의 적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으니까요.”
“그렇지. 많이 신경 쓰였다.”
두 사내는 걸음을 옮겼다.
왕의 거성에 당도한 그들은 안으로 들어섰다. 거성 건물 안의 또 다른 작은 건물인 왕의 거처에 도착한 그들은 옷매무새를 정돈하였다.
“자네는 안 들어가나?”
“저는 아직 그 안으로 들어 설 수 있는 자가 아닙니다.”
샤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섰다.
“으응?”
안으로 들어서자 어둠이 그를 맞이했다. 순간 그의 눈으로 검은 인영들이 휙휙 지나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의 얼굴을 스치며 붉은 피가 꽃잎처럼 공중으로 솟구쳤다.
“큭!”
본능적으로 그는 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 움켜진 것은 몰록이었다. 그는 그의 목덜미를 살짝 쳐서 기절 시킨 다음 아무렇게나 집어 던졌다.
“역시 피의 날개 한인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샤이칸...”
실내에 불이 켜졌다. 저 앞으로 왕이 앉아 있는 옥좌가 보였다. 그 옆에는 당연하다는 듯 샤이칸이 서 있었다.
“녹슬었을 줄 알았는데 아직 한창이군, 샤일.”
“무인의 피는 늙어도 끓어오르니까.”
“알고 있겠지? 우리 몰록의 국사는 왕의 도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왕의 강함을 가르치는 것이다. 과거의 자네는 강했다. 지금의 자네도 예전만큼 강한지 시험해야겠다.”
“차가운 살육자 샤이칸의 입에서 말이 많아졌군.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자네의 힘부터 점검해보지 그래?”
샤일의 도발에 샤이칸의 미간이 찌푸려지며 눈 아래가 부들부들 떨렸다. 하지만 참아냈다. 이상하게도 그는 샤일의 도발만은 그냥 받아 넘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지?”
“살아남아라. 단.”
“단?”
“몸에 상처가 하나도 없어야 한다.”
샤이칸이 두 손을 앞으로 뻗자 바닥에 두 개의 주홍빛 둥근 원이 그려졌다. 점차 빛은 위로 솟아오르며 기둥이 되었다. 기둥이 사라지자 두 개의 커다란 석상과도 같은 육중한 무엇인가가 나타났다.
“이 따위 인형을 지금 상대하라는 거냐?”
“훗... 이 따위라는 말이 나올 상대는 아니다.”
샤일의 두 손이 푸른 뇌전으로 이글거렸다. 금방이라도 무언가를 박살 낼 것만 같았다. 샤일은 빠르게 내달리다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다. 그의 손에서 이글거리는 뇌전은 사방으로 스파크를 뿌리며 한층 더 강렬해졌다.
“맞아라!”
순간 석상의 몸에서 촉수가 뿜어져 나왔다. 수십 개의 촉수는 금속성이었으나 유연성은 마치 고무 같았다. 휘리 소리와 함께 내쏘진 푸른 뇌전을 스치고 샤일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는 촉수를 공중에서 몸을 틀어 피하고 착지했다. 하지만 자세를 잡기도 전에 그를 향해 석상의 커다란 주먹이 날아왔다.
그는 손 뻗어 주먹을 막아냈다. 무언가 벽에 부딪친 것처럼 허공에서 주먹이 멈췄다. 하지만 주먹의 충격파로 인해 샤일은 뒤로 물러났다.
“뭐가 이래...”
그는 충격으로 저려오는 한손을 휘히저었다.
“뇌전에도 충격이 없다니.”
샤일의 혼잣말에 샤이칸이 말했다.
“뇌전이 통하지 않는 재질이니까.”
샤일은 웃음을 머금었다. 그의 웃고 있는 눈이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뇌전이 통하지 않는 재질이란 없어!”
그가 눈을 크게 뜨자 석상의 움직임이 멈췄다. 점점 아래로 엎드려지는 석상! 바닥은 쿠지직 소리를 내며 둥글게 내려앉았다.
“꿇어라!!”
그의 외침과 함께 석상은 무릎을 꿇었다. 동시에 바닥은 더욱더 크게 내려앉았다. 샤일의 손에서 이글거리는 푸른 뇌전은 검처럼 날카롭게 형성화 되었다.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예리했다. 그의 뇌전의 검은 빠르게 2기의 석상의 머리와 팔다리를 잘랐다. 그대로 ‘쿵’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석상의 몸덩이. 몸덩이는 산산조각 났다.
샤이칸의 눈이 커졌다. 순식간에 모든 것이 끝났다. 저 석상의 힘은 몰록의 전사들 보다 한층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 그런 석상을 순식간에 쓰러트렸다. 그의 힘은 신마대전 때에 못지않았다. 아니. 더욱더 강해졌다.
“이정도면 왕의 스승으로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겠나?”
샤일이 손을 한번 휘젓자 푸른 뇌전의 검이 사라졌다. 눈에는 샤이칸을 압도할 정도의 기운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 정도면 되겠군.”
샤이칸은 떨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섭정이여. 그렇다면 허락한 것인가?”
그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이제 이 나라의 국사일세. 허나 국사 이외의 다른 임무도 있네.”
“무엇인가?”
“왕의 호위를 맡아줄 수 있겠나?”
“호위?”
샤이칸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귀족들은 왕의 존재를 달가워하지 않는다네. 15년이라는 세월이 우리 몰록에게는 그리 긴 시간이 아니지. 하지만 탐욕에 찌든 자들에게는 더 짧은 시간이야. 귀족들은 왕이 없는 당시의 달콤함을 잊지 못해.”
“그래서?”
“왕을 시해하려 하지.”
“근거는?”
“없다.”
샤일은 피식 웃음을 보였다.
“섭정자의 두려움 아닌가? 왕이 없으면 섭정자의 위치도 흔들릴 테니까.”
“어떻게 생각해도 좋다. 하지만 왕만은 꼭 지켜주길 바란다.”
“좋아.”
샤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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