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정리된 상자들처럼 일사불란한 회색빛 건물들. 그 아래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옷차림은 모두 연한 갈색의 로브로 통일 되어 있었다. 마치 인간의 수도사들처럼 경건한 표정과 발걸음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들의 머리카락 색깔은 절제된 행동거지와는 어울리지 않는 아름다운 총천연색이었다. 그 머리카락 사이를 비집고 나온 양옆의 뿔은 양의 것과도 같았고, 사슴의 것과도 같았고, 양의 것과도 같았다. 저마다 제각각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자유분방한 모습의 샬록과는 많이 다른 경직된 모습의 이 사람들이 몰록이었다.
이곳은 몰록의 수도, 옛 미국이라 불리던 패권국가의 경제 중심지가 자리했던 곳이다. 지금의 이름은 카로이나. 저 멀리 보이는 횃불을 든 여성 우상의 무너져 내린 모습이 이곳의 옛 이름을 짐작케 했다. 남아 있는 것은 그것뿐. 인간이 있을 때의 자취는 모조리 사라지고 검소하고 절제된 몰록의 건물들만이 즐비한 곳이 되었다.
이곳에 들어선 한무리로 인해 조용하던 몰록들의 조금씩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하얀 옷을 입고 하얀 머리카락을 지닌 온통 하얀 샬록들이었다. 휘장이 새겨진 기다란 깃발을 들고 오는 것으로 보아 사절단인 듯 했다. 그들의 맨 앞에 두 사내는 예물을 들고 있었다. 한 사내는 우직한 모습의 로만이었고, 또 다른 사내는 샬록과 몰록의 혼혈인 샤일이었다.
샤일의 모습을 확인한 몰록들은 극도의 거부감을 드러냈다. 어찌 그들의 그의 얼굴을 잊을 수 있겠는가? 몰록의 피를 지녔음에도 수많은 몰록들의 살해한 악귀였다. 주먹을 쥐고 금방이라도 달려 들 것만 같은 몰록들이 많이 보였다. 하지만 샤일은 괴이치 않고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역시 몰록들에게 자네의 인기는 아주 장난이 아니로군.”
“이래봬도 인기인이니까.”
어깨를 한번 들썩인 샤일은 하늘을 앞을 바라보았다.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는 건물이 있었다. 뾰족한 지붕이 인상적인 건물은 7층 이상이고 주변 건물 수십여 개는 붙여 놓은 듯 한 넓이의 건물이었다. 단층의 건물을 즐겨 짓는 몰록의 건물과는 위용부터가 달랐다. 허나 다른 몰록의 건물과 마찬가지로 회색이었고 장식은 없었다.
이곳은 몰록의 왕의 성이다. 신마전쟁 이후 사라진 왕이었지만 다시 강림할 왕을 위해 건축했다. 그 덕분에 새로운 왕의 재목이 등장한 지금 이 성은 그를 위한 장소로 잘 이용되고 있었다.
장정의 키 3배는 되어 보이는 높이의 커다란 문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은은한 향취와 함께 관복을 잘 차려 입은 몰록의 재상들이 나왔다. 관복이라고 해봤자 화려하지 않은 자수를 넣고 망토를 두른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가슴에 몰록의 뿔로 조각한 브로치가 달려 있었다. 그것만큼은 보석장식이 되어 있어 꽤 사치품으로 보였다.
“어서 오시오, 샬록의 사자들이여.”
그들의 환영은 거부감을 보이지도 않았고 그저 담담했다. 이 모습에 로만은 고개 숙여 인사했다. 샤일 역시 고개 숙였다. 몰록의 재상들은 안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조심해야 하지 않겠나? 복병이 숨어 있을 수도 있으니.”
“몰록은 그렇게 비겁하지는 않네.”
그의 말 대로였다. 아주 긴 복도를 향하는 동안 몰록의 복병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넓은 복도와 홀을 지나다니는 몰록의 귀족들만 보일 뿐이었다. 그들 역시 약간의 놀람은 있었으나 담담하게 샬록의 사절단을 맞이했다.
길다란 복도를 십여 분 정도 걸어서 나가니 이제는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건물 안의 정원이라는 특수한 모습에 로만 휘하 많은 샬록들이 신기한 듯 두리번거렸다. 건물 안에 있다 뿐 화려한 꽃은 없었고, 그저 푸른 나무들이 여기저기 심겨져 있었다. 드문드문 보이는 과실과 채소류들이 이곳의 용도는 정원뿐만이 아닌 실용적인 측면도 함께 있음을 보여주었다.
저 멀리서 곡괭이질을 하는 몰록 한명이 보였다. 눈가에 큰 상처가 있는 푸른 머리의 몰록 사내였다. 그는 묵묵히 괭이질을 하다 사절단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의 양미간이 찌푸려졌다. 눈에는 살기가 그득했다.
“피의 날개 한인가?”
샤일을 아는 듯 바라보는 푸른 머리의 사내는 샤이칸이었다.
“이 눈의 상처... 기억하고 있나?”
샤이칸의 말에 샤일은 고개를 절래 흔들었다.
“하도 많은 몰록들을 베어서 그런 상처 따위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당신은 누구죠?”
샤일의 도발에 그는 주먹을 꼭 쥐었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보였지만 그는 참고 또 인내했다. 그는 지금 사절단의 신분으로 와 있다. 공격을 가하면 몰록에 큰 해를 끼치는 일이 될 것이다.
샤일과 사절단은 몰록의 재상들과 함께 앞으로 나아갔다. 뒤통수가 따끔 거릴 정도의 샤이칸의 살기가 있었지만 그는 괴이치 않았다.
“심한 장난이군. 저자는 화를 잘 참지 못하는 자가 아닌가.”
“하지만 화를 낼 때와 내지 않을 때를 잘 알고 있는 사내지. 불같지만 얼음같아.”
샤일의 칭찬에 로만은 고개를 절래 흔들었다.
정원이 지나가지 이제는 조금은 화려하게 보석과 대리석으로 장식된 건물 안의 건물이 보였다. 그곳에 당도한 재상들은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많은 몰록의 대신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사절단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그들의 중심에는 옥좌에 앉은 어린 왕이 있었다. 그는 완전한 몰록 같지는 않았다. 염색이 빠졌는지 머리끝이 검은색이었지만 머리는 샬록처럼 하얀색이었다. 그리고 양 옆으로 조그마한 뿔이 나 있었다.
샤일은 예를 갖추지도 않고 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왕은 그런 그의 모습을 무미건조하게 바라보았다. 샬록과 몰록의 혼혈은 흔한 일이 아니다. 만약 샬록과 몰록이 사랑에 빠지면 그들은 가차 없이 죽임을 당하고, 만약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마저도 죽인다. 샤일은 특별한 경우로 어머니는 샬록의 여사제였고, 친부는 몰록의 좌현왕이라는 직위로 인해 용서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아주 이례적인 것으로 세간의 질타를 받는 아주 특별한 사건이었다. 그런 경우가 아닌데도 혼혈이 살아남고 또한 몰록의 왕이 혼혈이라니 이건 말이 되지 않는다.
“폐하도 혼혈이군요.”
샤일의 말에 대신들이 술렁였다. 인사로 예를 갖추기도 전일뿐더러, 자신들의 왕에게 혼혈이라는 말을 함부로 하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도 혼혈입니다. 이중에 제 친척도 있지요.”
왕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그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아, 이런. 예를 갖춥니다. 저는 샬록의 사절으로 온 샤일 파인나 한입니다.”
“저는 로만 베르제르 카이만입니다.”
두 사람이 모록의 양을 향해 반무릎을 꿇고 인사했다. 뒤쪽의 사절단들 역시 무릎을 꿇었다.
“무슨 일로 오셨소.”
뒤쪽에서 인간이 쓰는 밀짚모자와 고무장화를 신은 농부의 차림의 샤이칸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아직도 흙이 묻어 있었다.
“인간들은 이런 복장으로 땅을 가꾸더군. 생각보다 시원하고 발은 편하지.”
그는 옷의 묻은 흙먼지를 밀짚모자로 탁탁 털어내고 옥좌의 옆으로 나아갔다. 옥좌의 오른편에 선 그는 몰록의 섭정의 의미였다.
섭정자 샤이칸. 그는 사분오열된 몰록을 통일하고 왕이 올 때까지 다스린 불세출의 영웅이다. 마신전쟁 때에도 큰 공을 세운 전쟁영웅이기도 했다.
“섭정이라는 뜻입니까?”
샤일의 물음에 샤이칸은 콧방귀를 끼었다.
“섭정의 옷차림은 아니로군요. 격이 없는 것입니까, 예의가 없는 것입니까?”
샤일의 도발에 샤이칸의 얼굴에서 노기가 가득했다. 하지만 자리가 자리이니만큼 표시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이 편지를 전하러 왔습니다.”
샤일은 사절단의 한명에게서 원통의 상자를 받아 들었다. 금으로 장식된 아주 호화로운 것이었다. 그것을 샤일이 직접 당당히 걸어가 왕에게 내밀었다. 샤이칸은 그것을 받아들기 위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샤일은 그에게 주지 않으려 상자를 다시 자신의 품으로 끌어 당겼다. 샤이칸의 손은 민망하게 허공을 갈랐고 왕은 ‘풋’하고 웃음을 보였다.
“괜찮습니다. 저는 몰록의 글을 읽을 줄 몰라요. 섭정이 읽어도 좋습니다.”
그러자 샤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폐하께서 직접 받아들이고서 섭정자에게 주든 바보에게 주든 하십시오.”
다시금 웃음을 보이는 왕은 천진한 인간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하지요.”
왕은 다시금 무미건조한 모습을 보이며 샤이칸에게 원통 상자를 내밀었다. 샤이칸은 그것을 받아 쥐고는 안에 든 편지를 꺼내 들었다.
“화친을 맺자는 것이오? 이미 정전 협정이 들어간 상태에서 이런 의미 없는 편지를 보낸 연유가 뭐요?”
“우리의 의지를 다시금 보여드리기 위함이죠. 새로 등극하신 폐하의 용안도 한번 뵙고 오라는 귀족연맹의 분부가 있었습니다.”
샤일의 대답에 샤이칸은 아무렇게나 다시 편지를 원통에 집어넣고 샤일에게 던졌다. 그것을 받아 쥔 그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사라졌다. 아무리 의미 없는 내용의 편지라지만 사절단의 편지를 마음대로 하는 그의 모습에서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내 다시 속을 알 수 없는 눈감는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이정도면 우리의 의지를 잘 전달했다 생각합니다.”
샤일의 말에 샤이칸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절단을 위한 숙소가 마련되었소. 재상 중 한명이 안내할 것이오.”
샤일은 다시금 왕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하고 뒤로 물러났다. 샤이칸은 계속해서 그를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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